지리이야기

지리의 유래...

범주 2005. 4. 22. 09:05
지리산은 옛날에 지리 또는 두류산이라고도 하였고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삼신산으로 불리었으며, 신라시대에는 토함산, 계룡산, 지리산, 태백산, 팔공산을 오악이라 하였는 데 그 오악 중 지리산은 남악이라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이자(1967년), 최대면적의 육상공원(14억 5천 6백만평)으로서 우리나라 산악의 대표성과 상징성 그리고 역사성을 고루 갖춰 흔히 민족의 영산으로 불릴만큼 우리의 정서속에 깊이 새겨진 자연유산인 지리산(智異山)은 산이 넓은 만큼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두류(頭流), 방장(方丈), 지리(地理또는地利), 불복(不伏), 반역(反逆), 적구산(赤拘山)으로 불려온 산 이름에서 벌써 지리산의 속내와 아픔을 알 수 있을 정도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백두산에서 흘러나온 산맥이 지리산에서 멈추었다 해서 두류(頭流)로 한다 라고 썼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산세가 멀리 넓게 둘러있는 산이라는 뜻으로 순 우리말 '둘러' '두루' '두리' 에서 음을 따와 한문으로 쓰다보니 '두류'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불교적 용어로 대지문수사리보살의 지자와 리자를 따와서 지리산으로 불리다가 '지혜로운 이인이 많은 산' 이라는 뜻으로 변형돼 현재는 지리산으로 쓰인다고도 하며, 일부에서는 지리산이 크고 웅장해 「지루하다」의 남녘 사투리 「지리하다」에서 자연스럽게 변형된 말이라고도 한다.
방장산은 봉래산(금강산), 영주산(한라산)과 더불어 중국에서 말하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지리산을 지칭하는 이름인 동시에 불교적인 의미로도 쓰이는 산이름이다. 현재 쓰고 있는 지리산(智異山)은 쌍계사 앞뜰에 있는 국보 제47호 진감선사 대공탑에서 출발한다. 신라 정강왕 2년(887)에 최치원이 쓴 비문에 '지리산(智異山)'이 나온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지리산(地利山)으로 표기 했다가 『삼국유사』는 다시 '지리산(智異山)'을 썼으며, 조선시대에 편찬한 『고려사』는 '지리산(智異山)'으로 고쳐 썼다.
'지리산(地利山)'은 지리산이 문수도량이라 하여 문수사리(文殊師利)의 글자를 따서 부른 이름이며, '불복(不伏)'과 '반역(反逆)'은 태조이성계가 조선 창업의 큰 뜻을 품고 명산을 찾아 기도할 때 유독 지리산에서만 소지(燒紙)가 오르지 않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이유로 태조에 등극한 뒤에 지리산을 불복산, 반역산이라 하고 전라도로 귀양을 보냈다고 한다.

「금강산은 빼어나되 웅장하지 못하고, 지리산은 웅장하되 빼어나지 못하고」라는 서산대사의 비유가 있듯 지리산은 날카롭고 빼어남은 부족하나 웅장하고 두리뭉실한 기운이 돋보인다. 행정구역상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山 208번지에 소재한 천왕봉(1,915m)을 주봉으로 반야봉(1,732m), 노고단(1,507m)이 대표적이며, 천왕봉에서 노고단을 잇는 100리 능선에는 1천 5백미터가 넘는 고봉이 10개, 1천미터가 넘는 봉우리가 20여개나 있을 정도로 높고 크다. 평평한 고원지대도 많이 발달해 야생화나 철쭉 등이 장관을 이루기도 한다.
해발 1915m, 지리영봉의 제1봉인 천왕봉, 아래 로 땅을 누르고 위로는 하늘을 찌를듯 우뚝 솟아 찾는 이를 알도록 한다. 거대한 바위를 예로 부터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란 의미를 풀이해 천주라 불렀음인지 서쪽 암벽에 "천주"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남명 선생이 일찍이 "萬古天王峰 天嗚猶不嗚"이라며 "하늘이 울어도 아니 우는 뫼" 로 지리영봉의 장엄함을 찬탄했듯 그 위용은 아직도 변함없다. 천왕봉은 반야봉과 노고단등 1백10여개의 우뚝 솟은 준 봉을 거느리고 그 아래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크고 작은 봉우리들의 호위를 받으며 그 웅장함을 자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연하선경에 울창한 원시림과 골골 마다 용솟음 치듯 흐르는 물보라등 태고의 숨결을 발아래 숨겨둔채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지리산과 더불어 구례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은 지리산 노고단에서 하늘과 산에 제사를 올리고 국태민안과 시화연풍을 기원하였는데, 신라시대부터 매년 나라에서 제관을 보내어 중사의 제례를 받들어 오다가 조선시대부터는 노고단 남쪽 현재 광의면 온당리에 단을 세우고 제례를 지냈습니다.
노고단은 천왕봉, 반야봉과 더불어 지리산 3대 주봉중에 하나로 1,507 m이다. 노고단 정상은 길상봉이라 불리며 정상에서부터 서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30만평의 넓은 고원이 있다. 옛날에는 이곳에 지리산 신령 선도성모(仙桃聖母)를 모시는 남악사(南岳祠)가 있었다하여 '산신할머니를 모시는단' 이라는 의미의 노고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달밤이면 푸른 숲 위로 떠오르는 달빛이 너무나 희고 맑아서 오히려 푸르게 보인다 하여 옛부터 이곳을 벽소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벽소령의 달은 지리산 10경 중의 하나다

옛날 부근에 피밭[稷田]이 많아 피밭골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바뀌어 피아골이 되었다. 임진왜란•조선말 격동기•여순반란사건•6•25 등 나라가 어지러울 때마다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곳이다.
※ 피아골의 유래 : 피아골은 옛날부터 이곳에서 고대 오곡중 하나인 피를 많이 가꾸었던 연고로 자연히 피밭골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점차 발음이 피아골로 전환된 것이라 하며 지금도 피아골 입구에 직전(稷田)이란 마을이 있어 이 유래를 실증하고 있다.
해발 1,480m에 위치한 연하천은 명선봉의 북쪽 중간에 위치한 높은 고산지대인지라 숲속을 누비며 흐르는 개울의 물줄기가 마치 구름속에서 흐르고 있는 것 같다하여 연하천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연하천에서 오른쪽으로 약 2km지점의 삼각고지는 해발 1,470m의 돌출봉으로 이곳에서는 좌우로 탁 트인 백무동 계곡과 화개골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북쪽 능선으로 내려가면 영원재와 삼정산을 거쳐 실상사로 내려갈 수 있으며 삼각고지에서 다시 종주능선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길목 왼쪽 능선 위에 형제바위가 있는데 언듯 보기에는 한 개의 큰 석상으로 보이나 자세히 살펴보면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두 개의 석상이다. 이 석상에 얽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지리산에서 두 형제가 수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이들에 반한 지리산 요정이 두 형제를 유혹하였으나 형제는 유혹을 물리치고 득도하였다. 그러나 성불한 후에도 집요한 지리산 요정의 유혹을 경계해 형제가 서로 등을 맞대고 너무 오랫동안 부동자세로 서 있었기 때문에 그만 몸이 굳어 그대로 두 개의 석불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왕시루봉은 정상부에 넓은 초원이 형성돼 있어 그 모양이 마치 두리두리한 큰 시루 같다하여 부르게 된 이름이다. 산이 높고 (해발 1,243m) 그 발 아래 섬진강 청류가 흐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백운산을 마주 보고 있기 때문에 수려한 경관은 비길 데가 없다. 더욱이 가을철에는 정상부 초원을 억새풀과 갈대가 아름답게 수놓는다.


해발 1,732m의 3대 주봉인 반야봉은 노고단에서 임걸령으로 뻗어 나가는 높은 능선으로 이어지는 동북방 약 8km지점 지리산권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 지리산의 전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반야란 불교의 반야심경에 나오는 지혜를 뜻하는 명칭이다.

덕평봉 남쪽 상덕평 능선 해발 1,500m에 있는 샘터를 선비샘이라 한다. 수량은 적으나 마르는 적이 없고 주위가 평탄하고 넓어서 야영하기에도 좋다. 이 샘을 선비샘이라 부르는 데는 한 화전민의 서글픈 사연이 있다. 옛날 덕평마을에 이씨 노인이 살고 있었다. 노인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화전민의 자식으로 가난에 쪼들리며 평생을 살았다. 배우지 못하여 무식한데다 몹시 추하게 생겨 주위 사람들로부터 천대를 받으며 노인은 한번이라도 남에게서 사람다운 대접, 선비대접을 받으며 살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살아 생전 소원을 이루지 못한 그는 마지막 유언으로 상덕평 샘터 위에 묻어 달라고 부탁했고 효성이 지극한 두 아들은 아버지의 유해를 샘터 위에 매장 했다. 그로부터 매년 지리산을 찾는 등산객들은 샘에서 물을 마실 때면 반드시 노인의 무덤 앞에 인사를 하게 되니 생전에 그렇게 받고 싶었던 선비대접을 무덤 속에서나마 받게 되었다. 후일 동네사람들은 생전에 불우했던 이씨 노인을 위로하기 위해 이 샘을 선비샘으로 부르게 됐다.
임걸령은 노고단에서 반야봉으로 이어지는 8km거리 능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 1,320m의 높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우뚝 솟은 반야봉이 북풍을 막아주고 노고단의 능선이 동남풍을 가려주어 산속 깊이 자리한 아늑하고 조용한 천혜의 요지이며 샘에서는 언제나 차가운 물이 솟고 물 맛 또한 좋기로 유명하다. 이곳은 옛날에 의적이나 도적들의 은거지였던 곳으로 유명하며 특히 의적 임걸(林傑)의 본거지였다 하여 임걸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샘터에서 피아골족 암벽 밑에 막(幕)터가 있는데 이곳을 '황(黃)호랑이막터'라고 부른다. 옛날에 약초를 캐는 황장사가 눈내리는 겨울밤 이곳에서 천막을 치고 자다가 호랑이를 잡았다는 전설이 있다.


뱀사골이란 명칭의 유래는 뱀사골계곡 입구에 있는 석실 건너편에 배암사(背岩寺)란 절이 있었는데 배암사골이란 이름이 변해 뱀사골로 됐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배암사 역시 정유재란 당시 소실돼 버리고 지금은 이름만이 전해온다. 그러나 뱀사골은 유독히 용이나 뱀에 관련된 이름을 가진 명소가 많이 있는데 요룡대(搖龍臺)는 용이 머리를 흔들며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탁용소(擢龍沼)는 큰 뱀이 탈피하여 용이되지 못한 이무기가 살던 곳을 뜻한다. 이 밖에도 병(甁)모양의 병소, 암벽이 병풍을 두른 듯한 병풍소, 산신제를 올리던 곳이라는 뜻의 제승대, 소금장수가 소금가마니를 물 속에 빠뜨렸다는 간장소, 뱀사골 상류를 의미하는 들돌골 등이 유명하다

잔돌이 많은 평야와 같다고 하여 세석평전이란 이름이 붙은 세석고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고 높은 고원으로서 그 주위가 12km에 달한다.

해발 1,576m의 칠선봉은 작은 7개의 암봉이 높은 능선 위에 자리잡고 있어 마치 일곱선녀가 한자리에 모여서 노는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음양전
세석평전에서 남쪽으로 약 2km지점에는 평지에서 돌출한 큰 바위 밑에서 솟는 크고 맑은 두 줄기의 석간수가 합쳐 자연석정을 이루고 있는 샘터가 있다. 애를 못 낳는 남녀가 이 음양수를 마시고 산신령께 치성기원을 드리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옛날 이야기 때문에 지금도 이 음양수를 찾는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

노고단과 자매봉을 이루고 솟아 있는 차일봉은 그 모양이 마치 차일을 쳐 놓은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해발 1,356m이다. 차일봉은 우번대, 종석대, 관음대 등 여러 이름을 갖고 있는데 정상에 암봉이 솟아 있어 자연 전망대로서 구실도 톡톡히 하고 있다.

천왕봉의 자매봉인 제석봉의 남쪽능선 고갯마루를 장터목이라 부른다. 장터목은 1,650m로 옛날 천왕봉 남쪽기슭의 시천주민과 북쪽 기슭의 마천주민들이 매년 봄 가을 이곳에 모여 장을 열고 서로의 생산품을 물물교환 했던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한, 진한, 변한의 부족국가사회를 이루고 있던 삼한시대에 부족간의 큰 전쟁이 일어났는데 마한군에 쫓기던 진한왕이 전쟁을 피해 문무백관과 궁녀들을 이끌고 이곳 지리산으로 들어와 오랫동안 피난생활을 하였다 하는데 그때 도성이 있던 자리를 달궁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천은사를 기점으로 구절양장처럼 굽이치며 노고단까지 이어진 20㎞의 비경의 관광도로 그 옛날 성이 다른 3명의 장군이 지켰던 고개라 하여 성삼재(1,102m)라 했다. 아슬아슬한 도로와 까마득한 벼랑 위로 길이 나 있어 드라이브 코스로 백미다.

토끼봉이란 명칭은 주변에 토끼가 많다거나 봉우리가 토끼 모양이라서 그러는 게 아니고 반야봉을 기점으로 동쪽, 즉 24방위의 정동(正東)에 해당되는 묘방(卯方)이라 해서 토끼봉(卯峯)으로 부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