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 만용으로 혼자 지리산 종주
66년 8월 20일 남원에 도착하여 광한루와 읍내를 구경하고, 백무동가는 첫차를 타기 쉽도록 정류소 근처 여관에 묵었는데, 온갖 생각이 나며 잠이 오지 않아 거의 뜬눈으로 밤을 보내고 다음날 21일 첫차로 마천에 내려, 줄을 당겨 건너는 나룻배로 물을 건너 백무동에서 하동바위 쪽으로 산길을 시작할 때는 열 두시였다.
당시의 국도 지방도는 전부 비포장 이었고, 내가 지고 갔던 장비를 지금 생각하면 웃음을 참지 못한다.
면바지에 군용 워카를 신었으니 등산화 없던 당시에는 최고의 준비였지만, 배낭이 없어 여행용 가방에 군용담요(낡은것)한장, 군용 항고와 작은 냄비, 쌀 두되 반. 양념된장 한 병, 감자 서너 개, 간장과 소금 약간이 식품으로는 전부이고 가죽 케이스에 들어있는 쌍안경(군용소형)과 군용수통은 군용 탄띠에 달아 허리에 차고 카메라가 전부인데.... 참 비박용으로 원통형 비닐두마(180cm)와 끈까지...
취사는 나무를 때어 군용항고에 밥을 지으려 했으나 여름 고산이라 마른나무를 못 구할 경우에 대비하여, 남원에서 숯을 반포대가 덜 되게 싸서 비료 포대에 담아 가방위에 얹고 새끼로 묶었었다.
숯 포대 얹은 가방을 새끼로 멜빵을 걸어 짊어 졌으니 영락없는 거지의
행장이고, 허우대 멀쩡한 거렁뱅이가 산속으로 갔다. ㅎㅎㅎㅎ
하동바위로 오르는 길은 길이라기보다는 더러 사람이 다닌 흔적에 불과하고, 첫차 타느라 아침 굶고 마천에서 백무동까지 땡 빛 아래 걸어 왔으니 바람 없는 숲 해치며 건들거리는 돌 밟으며 오르자니 순식간에 죽을 맛이었다.
왼쪽 엄청 큰 바위덩이를 보고 하동바위구나 했을 뿐, 지치고 힘 빠지고 배고픈 거지는 달리 더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 거다.
참샘으로 가는 중간에 길이 냇바닥으로 한참을 가는데 돌 사이로 흐르는 물이 어이 그리도 찬지 손으로 한 웅큼 떠 마시려니 손이 시렸다.
오르막 돌길이 주춤하며 조금 평평한 곳에 주변을 다듬어놓은 맑은 샘물이 있었는데 거기가 참샘 이고 지금의 구조물은 전혀 없었다.
숲은 욱어진 것이 아니라 온통 싸잡아 하늘을 덮어 한낮인대도 어두운 골방 같이 컴컴하고, 참샘 다음의 능선까지 가파른 길은 힘이 없어 가다가 쉬는 것이 아니라, 쉬다가 조금씩 가는 형편이었다.
갑자기 앞에서 각각 자루를 멘 두 사람이 나타나는데 가만히 보니 손에 든 막대기로 보아 뱀 잡는 땅꾼들이다.
천왕봉까지의 남은 여정과 길을 물어보고, 백무동까지 길 오른쪽으로 걸려있는 와이어 줄이 뭐냐고 물어보니 벌채하여 원목을 내리는 강철 줄이지만 지금은 작업을 중지한 상태라 한다.
소지봉(당시에는 이름을 몰랐음)에서 백무동까지 강철 와이어줄을 걸어 놓고 소지봉 위쪽의 나무를 줄에 달아서 하산 시켰던 것이다.
한참 뒤에 도벌꾼이 흔적을 감추려고 불을 질러 제석봉을 태웠다는 말을 듣고 생각하니 수 키로가 넘는 산에 와이어 줄을 거는, 당시로써는 대단한 공사를 관계기관이 모르게 할 수는 없었을 거고, 처음 작은 량의 벌채 허가를 받아 적법한 벌채를 하다가 허가량에 훨씬 초과하는 엄청난 도벌을 하게 되었을 것이고, 당시의 혼탁한 법치상황을 고려하면 관계 권력기관도 알면서 결탁하여 묵인하고, 뒤늦게 여론이나 기타의 문제가 노출되어 수습 무마하는 과정에 최악의 수단으로 불을 지른 어리석은 짓을 한 것이 아닐까 싶다.
<까마득한 기억을 더듬어 여기까지 쓰니 주책 부린다는 주위의 티방이 대단합니다>
출처 : 사랑방에서 하는 40년이 된 지리산 이바구
글쓴이 : 돌다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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