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이야기

[스크랩] 사랑방에서 하는 40년이 된 지리산 이바구 마지막.

범주 2006. 9. 2. 21:16

덕평에서 아침 일찍(66년 8월 23일) 출발하는데 온통 구름 속이라 원경은 보이지 않고, 비가 오지 않아도 나무에서는 굵은 물방울이 떨어지고 스치는 풀과 산죽에 맺힌 이슬로 금방 아랫도리가 젖어 신발 속은 질척거리고...

더러 평탄한 곳이 몇 미터씩 있어 거기서는 무릎도 안 아프고 좋았지만, 내리막길에서는 왼쪽 무릎이 새큼 거리며 아파 두 분을 따를 수가 없어 애를 먹으며 평지 길을 원 없이 걸어보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후에 추정 해보니 임걸령 같은데 거기서 아침에 준비 해온 밥으로 점심을 먹고, 최병철 학생은 얼마 가지 않으면 노고단이라 하였지만 멀리는 보이지가 않으니 걷기만 했었다.

경사 완만한 오르막길에는 한결 가기가 좋아 나무 별로 없는 풀밭을 지나 더 오를 데가 없으니 노고단이라 한다.
구름 속에서 멀리는 안 보여도 저 아래로 희미하게 굴뚝같은 것이 몇 개 보였다.

얼마간 휴식을 하고 길 따라 내려가니 초가집이 한 채 있어 들어가니 40 대로 보이는 남자 한 분이 기거하고 있었다.

지금의 노고단 대피소 훨씬 위의 밭 같은 평지, 거기에 부엌과 방 두 칸의 초가가 있었으며 건너편과 그 밑으로 선교사 별장의 굴뚝이 있었다.
우리 셋이 자는 방에 뜨뜻하게 군불을 때어 지난 이틀 동안 추워서 떨었던 후라 그날은 참으로 좋았다.
초저녁부터 밤새 비가 억수로 와서 하산이 걱정되었다.

다음날(66년 8월 24일) 아침에도 비는 억수로 왔지만 우리는 화엄사로 하산 길에 들었다.

학생 두 분은 우의로 군용 판쵸를 각각 쓰고, 나는 180센티의 정방형 비닐의 가운데를 뚫어 목을 내어 모자를 쓰고, 두 팔이 나오도록 찢어서 거기로 팔을 내면 판쵸와 비슷한 모양이 되는데, 허리짬에 질끈 동여매면 양 팔은 노출되어 젖을지라도 몸통과 짐은 완벽하게 빗물을 피할 수 있었다.
(그 후 40년 동안 내 짐에는 겹 비닐 180 센티가 언제나 들어 있으며, 비박 할 때와 일인용 텐트 깔판 등 요긴하게 쓰고 있음)

뜨뜻하게 잘 자서인지 내 몸 상태가 한결 좋아져서 가파르고 험한 화엄사 내리막길에도 어려움이 없었고, 울창한 나무숲 덕인지 그렇게 많은 비가 왔는데도 건너는 냇물이 그리 많지도 탁하지도 않아 신기하게 보였다.

천신만고 지나온 고난과 고통의 길이었지만, 뜻을 이루었다는 성취감과 한결 좋아진 몸 상태하며... 장대 같은 비를 맞으면서도 즐거운 마음으로 하산을 하였다.

가파른 길의 경사가 완만해지고 화엄사 경내가 곧 보이려니 할 즈음에
길 오른 쪽에 산더미 같이 쌓아놓은 통나무가 있다.
차곡차곡 쌓은 원목 통나무의 부피가 얼핏 학교 교사크기 만큼 되지 않을까 싶어 놀라고 살피니...
그 앞에 큼지막하게 세워둔 경고판이 있다.

궁금하여 경고문 내용을 보니 < 불법으로 벌채한 원목으로 입건되어 증거물로 압류한 것이니 허가 없이 처리하면 엄중 처벌한다.>는 내용의
전라남도 경찰국장 辛 相 默; 명의로 쓴 경고문이었다.

신 상묵 이라는 이름을 보고 야릇한 감정에 분노를 느꼈으니, 辛相默;이라는 이름은 3년 전인 63년 8월 29일 한라산 단독산행 시에도 분노를 느끼며 보았던 이름이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절에 우리나라에 두 곳, 한라산과 지리산에 원시림이 남아있다고 배웠는데, 한라산을 오르면서 개미등(1250m), 개미목(1450m), 왕관릉을 거쳐 백록담 까지 오르면서 거듭 살펴봐도 원시림이라 할 만한 나무숲이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백록담 둑에 오르니 거기 비석이 하나 있다.

수첩에 적힌 그 비문을 옮겨 보면

전면에; 漢拏山開放平和記念碑
후면에; 檄文
永遠히 빛나리라
濟州道警察局長 辛相默;氏는 4.3事件으로 8年間 封鎖 되었든
漢拏山寶庫를 甲午年9月21日 개방하였으니 오즉 英雄的處事가 않이리요 다만 全道는 寄與된 自由와 福音에感謝할지어다
檀紀 4288年 9月 21日
神道部隊長 許 昌洵 記
東和林業社長 李光哲 建立

1955년 제주도 경찰국장 신상묵과 1966년 전라남도 경찰국장 신상묵이 동일인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辛相默이라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단 두 곳
남은 원시림을 깎은 원흉이 아닐까 싶어 통분을 느꼈던 기억이 40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 지지 않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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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수로 내리는 빗속에서 화엄사를 둘러본 후 서울 학생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그들은 구례로 나는 하동 진주 거쳐 대구로 오는데, 하동 진주 간에는 운전기사와 여차장과 나와 셋 뿐 이고, 물에 잠긴 들판에 길이 안 보여 가로수를 차선으로 삼아 앞으로만 왔던 구간이 있었다.

서울 학생들이 갖춘 장비로 군용텐트와 판쵸, 군사용지도와 고도계, 휘발유 버너와 닉샥(닉구삭구라 했음), 10여m 로프는 내 능력으로는 가질 수 없는 선망의 장비였다.

마치며 돌이켜 보니 너무 오래된 기억이고 글재주 또한 어설픈 처지라 많은 동호인들에게 보다 자세히 알릴 수 없어 한없이 아쉽습니다.
66년 당시에는 종주하는 전 구간에 대구 산악회장 한대덕씨 아드님 되신다는 한 분을 만났습니다.

얼마의 사람 지나간 발자취 뿐 길은 있을 턱없고, 그래서 산죽 욱어진 구간에서는 길이 잘 안 보이고, 차라리 능선 옆 비탈에서는 미끄러진 흔적이 더욱 뚜렷해서 길 찾기가 쉬웠습니다. -끝-
출처 : 사랑방에서 하는 40년이 된 지리산 이바구 마지막.
글쓴이 : 돌다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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